솔직해 집시다



가장 여러번 본 책은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다음과 같은 책들이 나옵니다.


삼국지, 걸리버 여행기, 로빈스 크루소, 종의 기원, 군주론, 돈키호테, 러셀, 심하면 칸트까지....

아, 세익스피어도 있군요.



솔직하지 못해요...


이 책들은 인류의 지혜가 담긴 고전들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책을 자주 보는 분들이 ‘정말로’ 있을까요? 웬지 이런 고전 하나쯤 들먹여야 교양을 뽐낼 수 있다는 ‘은밀한 과시’가 아닐까요?


고전의 정의를 ‘많이 들어 봤지만 읽지 않았고, 읽지 않을 책’이라고들 합니다. 인류 지성의 보고이다보니 자주 들어볼 수 밖에요. 그렇지만 읽으려고 손에 잡으면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 어렵고 두껍거든요. 그리고 그림도 거의 없습니다.


시원한(?) 줄간격과 화려한 디자인, 그리고 인터넷 스크롤에 익숙해진 스마트폰 시대의 독자들에게 500페이지가 넘어가는 빽빽한 텍스트로 가득찬 고전을 읽는 것은 말 그대로 고문입니다.




군것질도 필요합니다.


왜 우리는 이러한 ‘고전’급 독서만이 진정한 책 읽기라고 생각할까요? 아마 이렇게 대답하겠지요. ‘삶의 지평을 열어주고, 인식을 어쩌고 저쩌고...’


그럼 고전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삶의 지평이 좁은 분들인가요?


엄숙주의가 개그의 대상이 된 가벼운 세대입니다. 카리스마 최(배우 최민수씨)가 개그의 소재가 된 세상입니다. ‘가볍게, 더 가볍게, 공기보다 가볍게’라는 모토가 지배하는 현재입니다.


그런데 책에 대해서만은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엄숙주의가 아직도 판 치고 있습니다. 가벼운 책읽기도 필요합니다. 우리들은 밥만 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군것질도 해야 합니다. 초콜렛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인스턴트도 먹어야 합니다.




1년 동안 고전 100권을 읽는다고?


어떤 분은 1년 동안에 고전 100권을 읽었다고 자랑을하고 책도 쓰곤 합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기가 죽습니다. 웬지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듯한 죄책감에 사로잡히면서...

고전 100권을 읽는다... 


고전을 3일에 한 권씩 읽는 셈이군요.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책꽃이 꽃혀 있는 고전 중의 고전 ‘보부아르’여사가 쓴 ‘제 2의 性’이 543페이지군요. 그것도 하권만입니다. 상권까지 합하면 1,000페이지가 넘겠군요. 이런 책을 3일만에 읽는다라...

이놈의 호기심에 그냥 넘어갈 수 없군요. 한 번 계산해 봐야겠습니다. 한 페이지 읽는데 아무리 빨라야 2분은 넘게 걸립니다. (독자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무식하게 들어찬 텍스트들은 고려하지 않겠습니다.)


2분씩 1000페이지면 2000분이군요. 하루가 24시간이니까 분으로 바꾸면 24*60분 해서 1440입니다. 2000/1440하면 1.38일 걸리는군요. 아, 잠자는 시간은 빼야 하니까 2일쯤으로 잡아줍시다.


산술적으로는 가능해 보이는군요. 하루 종일, 밥도 안먹고, 일도 안하고, 화장실도 안하고, 물도 한 모금 들이키지 않고 읽는다면 가능은 합니다.




스캔은 독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읽고 이해가 될까요? ‘제 2의 성’은 최고 지성인 보부아르 여사가 일생에 걸쳐 얻은 지식과 지혜가 녹아있는 책입니다. 몇 십년에 걸쳐 나온 역작입니다.


‘종의 기원은’ 비이글 호 세계일주를 마친 20대 중반의 다윈이 고향인 촌구석 슈루즈베리에 25년 동안 쳐박혀 쓴 책입니다.


아마 한 페이지 쓰는데도 몇날 몇일 걸렸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고전을 2분만에 한 페이지씩 독해하고 3일만에 한권을 읽어낸다라...

이건 독해가 아니라 스캔입니다. 눈으로 스캔하는 것입니다. 독서라는 것은 눈과 두뇌의 상호작용입니다. 눈으로 읽고 두뇌로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얻은 것이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주면 최고입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 됩니다.


도대체 왜 이런 거짓말들을 할까요? 

답은 너무나 뻔합닌다. 


‘잘난척’하려고입니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생각하기 힘들군요.


책은 어떤 책이라도 좋습니다. 원피스같은 만화책을 읽고 루피 선장의 의리에 감동 받아도 좋습니다. 베르세르크를 읽고 가츠의 실존적 투쟁과 불굴의 정신에 감동 받아도 좋습니다. 열혈강호를 읽고 돈키호테같은 한비광에게 매력을 느껴도 좋습니다.


자기만의 책을 읽으면 됩니다. 




참고로,

요즘 제가 가장 자주 보는 책은 ‘미우라 켄타로’가 지금도 그리고 있는 ‘베르세르크’입니다.

죽기 전에 완결되길 바랄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