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이스털린의 역설(Easterlin Paradox)


한 부자가 호화로운 보트를 타고 해변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어부가 야자수 아래서 누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자는 빈둥거리는 어부가 처량해 보여서 물어 보았습니다.


부자: “왜 이 귀중한 시간에 고기를 잡지 않는 거요?”

어부: "오늘은 충분히 잡았는데요.“

놀란 부자가 물었습니다.


부자: “왜 더 잡지 않는 거요? 충분한 시간도 있는데?

어부: 왜 그래야 하는 거죠?

부자: 돈을 더 벌어서, 더 큰 보트를 사고, 더 큰 바다로 가서 더 많은 고기를 잡으면 당신도 나와 같이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요.

어부: 왜 당신같이 부가가 되어야 하죠?

부자: 한가한 시간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요.

어부: “난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걸요.”


유명한 이스털린의 역설(Easterlin Paradox)입니다. 행복은 수입의 증가와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지런히 일하는 것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불안한 세상에서 자신과 가족을 보호할 성채를 쌓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쉬지않고 더 부지런히 일합니다.


특히 전 세계에서 가장 긴 주당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야 게으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공공의 적입니다. 어릴 때부터 근면, 성실, 노력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라온 사람들이라 그런지 세계 인권선언과는 거리가 먼 살인적인 노동 시간도 잘 견뎌내는 편입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그런데 게으름은 정말 나쁜 것일까요? 최소한 버트런드 러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러셀 백작에 따르면 게으름은 문명을 발전시켜온 주된 공헌자입니다. 돈이 많아서 일할 필요가 없는 유한 계급들이 만들어 낸 것이 예술과 과학, 그리고 철학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철학에 대해서는 그의 주장이 일견 타당해 보입니다. 고대 그리스와 인도에서 철학과 종교가 발달한 것은 ‘노예제’ 때문이니까요. 노예, 또는 노예와 마찬가지인 하층계급이 모든 생산노동을 담당하던 고대 그리스와 인도에서, 남자시민과 지배층들에게는 남아 도는 것이 시간이었습니다. 이 한가한 시간 동안에 포도주 마시고 수다떨며 인간과 우주에 대해서 토론을 한 결과가 철학이니 특히 틀린 말은 아닌 셈이지요.


다음 글은 버트런드 러셀 백작이 쓴 ‘게으름에 대한 찬양(in the praise of idleness)’라는 에세이의 일부입니다. 러셀 백작 글들이 그렇듯이 가볍지는 않은 글입니다. 그렇지만 신선한 통찰을 주는 글이므로 시간내서 읽어 볼만 합니다. 한 번 볼까요?

 


게으름에 대한 찬양 중 일부



 게으름에 대한 찬양 해석

과거에는, 소수의 유한계층과 많은 노동자 계층이 있었다. 유한계급은 이점을 누리고 있었는데 이것들에 대해서 어떠한 사회 정의적 기초도 없었다. 이러한 것이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억압적이고, 동정심이 없게 만들었고, 이론들을 만들어 그것의 특권들을 정당화 하려고 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것의 우월성을 크게 줄였지만, 그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 전체에 공헌을 했다. 그것은 예술을 발전시켰으며 과학을 발견했다. 그것은 책을 썼고, 철학을 발명했으며 사회적 관계들을 세련되게 했다. 심지어 억압받는 사람들을 해방하는 것도 위로부터 시작되었다. 유한계급이 없었다면, 인류는 야만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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